인문학은 기술적인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쓸모없다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국립 대학의 인문 학부가 폐지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문과의 여러 과학이 도움이 되는지 또는 필요한 것인지 또한 습득해야 하는 것은 지식뿐만인지 등의 문제가 주로 인문계 연구자들의 사이에서 다루어왔다. 문과로 분류되는 과학 중 인문학 (전통적으로 철학, 역사, 문학의 세 분야로 구성된)이 돈을 버는 기술이 아니기에 쓸모없는 것은 확실하다. 문과의 나머지 영역, 즉 사회 과학에는 도움이 될만한 가능성이 있지만, 그것은 사회 과학 일반이 원래 자연 과학을 모델로 형성된 사회 현상의 자연 과학 이기 때문인것에 불과하다. 물론 많은 인문계 연구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 해왔다. 즉, 인간의 인간 다운 생활을 가능하게하기 위해서는 실용에 구석 구석까지 지배 된 세상의 상식을 비판적으로 상대화하는 것이 필요한다. 어떠한 견해를 상대화하여 그것에 대한 관점을 제공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따라서 인문학은 도움이 된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 본다면 이것은 대단히 무리한 주장이고 설득력을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도움이 된다'라는 형용사 술어와 문장의 주어가 될 수있는 것은 어떤 기술 내지 수단으로 유효한 것으로 한정되기 때문이다.
"도움이 된다"는 이러한 기술 내지 수단이 적절하게 사용 됨으로써 도달 할 수있는 상태가 미리 구체적인 방법으로 약속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축산학 축산의 도움 수산학은 수산의 도움 금융 공학은 금융 거래의 "도움" 그리고 이러한 경우의 "도움"을 의미하는 과학의 내용이 "있는 상태를 만드는 방법"에 관한 기술적 인 지식에 불과하다는 것과 다름 없다. (그래서 이러한 기술적 인 지식을 익힌 사람은 사회에서 "도움" "사람 자 재", 즉 어떤 도구로서 유용한 존재가 될 것이다.) 물론, 같은 의미에서 만엽집이나 보들레르의 연구가 뭔가 "도움"것은 아니다. 만엽집이나 보들레르의 연구가 "도움이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가능하게되기 위해서는 "도움이된다"라는 말의 정의를 바꾸게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인문학은 '성장'의 양식을 구하는 자에게만 필요하며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인문학이 무슨 소용이 없다 "는 주장은 어떤 유보를 요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문학이 도움이 된다 경우가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히 인문학은 자연 과학이나 사회 과학과는 비교가되지 않을만큼 근원적인 의미에서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불행히도, 인문학은 만인에게 "도움이된다"것은 아닐 뿐이다. 인문학에 침잠하여 무언가를 얻는 것은 인문학에 뭔가를 기대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인문학을 다른 제학에서 구별하는 결정적인 특징이다. 예를 들어, 지질학이나 법률학에 특별한 관심이 없어도, 또는 이러한 과학이 싫어하더라도, 지질이나 법률학을 억지로 "배우는"수는있다.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지식 (가능한 한 체계적인) 획득이 "배우는"의 도달 목표이며,이 「배운다」라는 작업의 결과로 획득 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 따라서 무 무제한 공유 가능 - 지식이 먼저 언급 한 의미에서 지질학이나 법률학은 도움이 되고 함께 필요한 것으로도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엽집이나 보들레르의 연구는 지질학 및 법학 교육과는 달리,이 작품의 능동적 인 해석이며, 능동적 인 해석의 수행에서 스스로의 경험의 지평을 업데이트하는 (= 있지만 견해의 틀을 확장하고 성장을 촉진하는) 작업이다.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가능하다해도, 이것은 어떤 방식 으로든 문학 연구가 아니라 인문학도 아니다 . 문학 연구는 문학 작품을 읽고이를 능동적으로 해석하여 스스로의 경험의 지평을 새롭게하고, 단어의 본래의 의미에서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만 그 기대에 부응 무엇인지를 솟라며 내민 것이다. 인문학과는 본질적으로이 같은 것이다. 인문학은 만 명에 의해 공유 될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경험의 새로운 지평을 추구하는 인간 다운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을 본래의 자신이되는 것을 바라는 소수자에게만 '필요 "이며"도움 "이다. 따라서 지질 및 법학의 경우, 이것들을 억지로 공부하는 것이 가능하다 반해 인문학의 경우, 억지로 공부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문학을 읽고, 철학을 읽을 아무런 기대도 안겨 않고 역사 속에 암기해야 할 정보의 오합지졸 밖에 발견 아니한 자에있어, 인문학은 시간과 에너지의 단순한 낭비 일 것이다.
인문학에 침잠 의해 이룩되는 「성장」에 정해진 도달점이없는 하지만이 견해는 다음과 같은 반론을 즉시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런 성장이라면 다른 과학자를 수행함으로써도 가능한 것이 아닐까, 아니, 사회에 "도움" "사람 우퍼 재료 '가 될'성장 '의 의미 인 것이 아니냐는 의견은 모두가 생각 나는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은 "사람자재" 즉 사회의 도구로 완성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회의 도구로써 스스로 완성시키는 노력은 미리 도달점이 설정되어 어떤 상태가되면 "사람 자재"로 평가되는지 본인에게 그 기준을 알고있을뿐만 아니라이 기준은 사회 전체에서 공유해야한다. 그러나 미리 설정된 도달점으로 향하는 것에 의해 획득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할 수있게된다 것"이며,이를 성장으로 간주 할 수 없다. 이에 반해 말의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성장, 즉 인간 다운 인간이 될 본래의 자신이 될 수는 정해진 도달점이라는 것이 없다. 도달점이 간파없는 것은 아니다. 원래 성장이라는 것은 정해진 도달점을 목표로 노력하여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모습을 반성하는 끊임없는 노력이 그 자체로 성장되는 것이, 스스로의 성장은 나중에 돌이켜봤을때 느껴지고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